막 2:1-12/ 당신의 소원은 무엇입니까?
본문: 막 2:1-12절
제목: 당신의 소원은 무엇입니까?
날짜: 2019년 1월 4일 금요일 저녁 8:30분~10:30분
찬양: 전능하신 나의 주 하나님은
(막 2:1-12, 개정) [1] 후에 예수께서 다시 가버나움에 들어가시니 집에 계시다는 소문이 들린지라 [2] 많은 사람이 모여서 문 앞까지도 들어설 자리가 없게 되었는데 예수께서 그들에게 도를 말씀하시더니 [3] 사람들이 한 중풍병자를 네 사람에게 메워 가지고 예수께로 올새 [4] 무리들 때문에 예수께 데려갈 수 없으므로 그 계신 곳의 지붕을 뜯어 구멍을 내고 중풍병자가 누운 상을 달아 내리니 [5]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작은 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6] 어떤 서기관들이 거기 앉아서 마음에 생각하기를 [7] 이 사람이 어찌 이렇게 말하는가 신성 모독이로다 오직 하나님 한 분 외에는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 [8] 그들이 속으로 이렇게 생각하는 줄을 예수께서 곧 중심에 아시고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것을 마음에 생각하느냐 [9] 중풍병자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걸어가라 하는 말 중에서 어느 것이 쉽겠느냐 [10]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11]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니 [12] 그가 일어나 곧 상을 가지고 모든 사람 앞에서 나가거늘 그들이 다 놀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이르되 우리가 이런 일을 도무지 보지 못하였다 하더라
오늘 2019년 첫 금요기도회에 오신 여러분을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오늘은 지난주 담임목사님의 말씀을 통해서 들었던 중풍병자를 고치신 사건을 통해 믿음의 중요성을 생각하며 2018년을 마무리 했습니다. 오늘은 마가복음 2장의 중풍병자의 죄사함을 선포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2019년을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지를 살펴보는 시간을 갖고자 합니다.
예수님이 공생애 동안 하신 일은 크게 3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가르치신 것, 둘째는 천국 복음을 전파하신 것, 셋째는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을 고치시고 보살펴 주신 것입니다.
이것을 요약한 말씀이 마태복음 4장 23절입니다.
(마 4:23, 개정)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의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
전도, 교육, 치유로 표현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따로 떼어서 보기보다 하나로 보아야 합니다.
백성중의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는 이유는 무엇인가? 천국복음을 전하기 위해서이다. 천국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하는가? 두루 다녀야 한다.
고치시기 위해 다니시는 것이 아니라, 천국복음을 전파하시기 위해 다니시고, 고치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사역이 오늘 본문을 통해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2019년 어떤 계획을 가지고 계십니까? 무엇을 위해, 누구를 위해, 2019년을 계획하고 계십니까? 2019년 소원은 무엇입니까?
말씀을 통해 오늘 우리가 소원해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 살펴보고자 합니다.
[1] 후에 예수께서 다시 가버나움에 들어가시니 집에 계시다는 소문이 들린지라
오늘 본문의 1절은 “예수님께서 다시 가버나움에 들어가시니” 라는 말씀으로 시작됩니다. 가버나움은 갈릴리 사역의 중심지였으며 예수님께서 최초로 공식적으로 하나님의 도(로고스), 하나님나라의 말씀을 가르치신 곳입니다. (1:21절) 갈릴리 호수 북쪽에 위치해 있어서 예수님 당시 가장 번성한 도시 중 하나였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아무도 살지 않는 곳이 되어 있습니다. 기록에 의하면 ‘나훔’선지자가 태어난 곳이라고 해서 가버나움이라는 지명이 붙었다고 합니다. 크파르(마을), 나훔(나훔)- 나훔의마을, (크파르 나훔).
예수님은 이곳 온 동네에서 병고침의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병고침과 귀신을 떠나가게 하신 표적은 하나님나라가 가까웠다는 말씀의 증거였습니다. 잠시 갈릴리 지역을 다니시며 전도하시다가 또 다시 가버나움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복된 장소가 가버나움임에도 불구하고 마태복음 11장 23-24절에서 정죄하신 곳이 되었습니다.
(마 11:23-24, 개정) [23] 가버나움아 네가 하늘에까지 높아지겠느냐 음부에까지 낮아지리라 네게 행한 모든 권능을 소돔에서 행하였더라면 그 성이 오늘까지 있었으리라 [24]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소돔 땅이 너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하시니라
가버나움 사람들은 가장 완전한 복음을 들었고, 그것이 대단히 놀라운 기적으로 입증되는 것을 눈으로 보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여전히 죄와 허물 가운데서 죽은 상태로 남아 있었습니다. 사실 복음을 규칙적으로 들으면서도 여전히 죄악과 세상 가운데 남아있는 것만큼 인간의 마음을 굳어 버리게 하는 것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도 복음을 듣고, 출석하는 것으로 머물지 말고 가버나움을 거울로 삼아 우리의 신앙을 매일 매일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2] 많은 사람이 모여서 문 앞까지도 들어설 자리가 없게 되었는데 예수께서 그들에게 도를 말씀하시더니
예수님의 소문을 들은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한번 만나보기 위해 집앞에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들이 이곳에 모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기적을 보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이 앞장에서 어떤 일을 하셨습니까? 귀신을 내어쫓으시고, 병을 고치시는 일이었습니다. 이러한 이적은 사람들을 모이게 만들었고, 특히 나병환자를 고치신 사건은 온 동네에 예수님의 소문을 퍼트리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나고자 하는 열망이 가득했습니다. 2절이 그 모습을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막 2:2, 개정) 많은 사람이 모여서 문 앞까지도 들어설 자리가 없게 되었는데 예수께서 그들에게 도를 말씀하시더니 방마다 사람으로 가득했고, 문 밖에도 사람들이 넘쳐났습니다. 더 이상 사람이 들어갈 공간이 없을 정도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하늘나라의 복음을 전하고 계신 이곳, 이집에 온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이었을까요? 예수님의 소문이 진짜 인지 확인하고 싶은 사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진리의 말씀을 듣고 싶어서 찾아온 사람도 있었을 것입니다. 친구따라, 아내따라 온 사람들, 사람들이 몰려가니까 같이 온 사람들 모두가 각자 자신만의 이유를 가지고 찾아왔습니다. 심각한 병에 걸려서 혹시 나도 고침을 받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서 온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오늘 본문에 나오는 서기관처럼 예수님의 가르침에 대해 의심을 가지고 예수님의 말씀이 진리인지, 율법에 어긋나는 것은 없는지 확인하기 위해 찾아온 사람도 있었습니다. 이렇게 주님이 계신 곳에는 다양한 목적과 다양한 사연을 가진 사람들로 가득차 있다는 것을 우리는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이들에게 오직 천국복음을 전파하기 위한 기회로 이용하셨습니다 마가는 그것을 단 한마디로 표현합니다. ‘도’를 말씀하시더니..
이 말은 ‘구원의 메시지, 복된소식, 복음’ 등을 의미하는 단어로 헬라어로 ‘로고스’입니다. 말씀 이라는 뜻입니다. 어떤 말씀입니까?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웠다는 것과 회개해야한다는 것, 복음을 믿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례요한(막 1:15) 이르시되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예수 (마 4:17) 이 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이르시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시더라
오늘의 교회에서도 동일한 일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교회는 주님이 계신 곳입니다. 교회는 건물이 아닙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두 세 사람이 모인 그곳에 주님이 함께 해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마 18:10) 교회는 주님이 계신 곳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모임에 두 명이 와도, 그곳에 주님이 계시면 그곳이 교회입니다. 세 명이 모이는 모임도, 주님의 이름으로 모인 그 곳에 주님이 계시므로 교회입니다. 우리의 모임 가운데, 강한 주님의 임재를 경험할 수 있는 것은 축복입니다. 따라서, 주님의 이름으로 성도들이 모이는 것을 서로 격려해야 합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히 10:25)” 모이기를 폐하지 말라고 하신 말씀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그렇다면 교회에 모이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지난 월요일 우리는 2018년 송구영신예배를 드렸습니다. 많은 분들이 나와서 한해를 기도로 마무리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축복을 받기 위해, 마음의 평화와 얻기 위해,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오시는 분이 있을 겁니다. 마음의 병과 육체의 질병을 고침 받으러 오신 분도 있을 겁니다. 주님의 말씀을 너무나도 사모해서 오시는 분도 있을 것입니다. 주일을 지키는 것이 주님을 높이는 일이라고 믿고 오시는 분도 있을 겁니다. 어릴 때부터 다니던 교회라, 습관처럼 오시는 분도 있을 겁니다. 주일에 다른 곳에 가면 왠지 ??해서 오시는 분도 있을 겁니다. 친구 만나러 오신 분도 있을 겁니다. 또한 성경을 잘 가르치고 있는지 확인하러 오시는 분도 있을 겁니다. 설교 분석하러 오신 분도 있을 겁니다. 이렇게 주님이 계신 교회에는 다양한 목적을 가진 사람들로 가득차는 곳입니다. 나이도 천차 만별이지요. 직업도 다르고, 취향도 다른 사람들이 모인 곳이, 주님이 계신 교회의 모습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명히 전해야 하는 것은 ‘복음’ ‘그리스도의 도’입니다.
제게 어느 날 이런 질문이 생겼습니다. ‘도대체 뭘하러 교회에 왔지?’
언제 이런 질문이 생겼냐면, 아이들 키울 때입니다. 사실 저보다, 아내가 더 고생을 했습니다. 아니, 엄마들이 사실은 모두 다 경험하는 일입니다. 아이들 키우는게 쉽지 않지요. 주일에 예배드릴 때에는 더욱 그렇습니다. 또한 아이들이 예배 시간이라고, ‘부모님 예배 잘 드리세요’ 라고 배려해 주지 않습니다. 자기가 울고 싶으면 울고, 웃고 싶으면 웃습니다. 배고프고, 기저귀 갈아달라고 웁니다. 걷지도 못하는 호기심 많은 아이들은 기어다니면서도, 정체를 알 수 없는 무언가를 맛있다고 집어 먹습니다.
걷기 시작한 아이들은 이것 저것 만지면서 일을 만듭니다. 예배 시간에 엄마들이 앉아 있을 수 있다는 것만해도 다행입니다. 그렇게 아이들을 돌보다 보면, 예배가 끝나 있습니다. 대부분의 간난 아이 엄마들의 특징은, 예배를 집중해서 드리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설교 시간에 무슨 이야기를 들었는지, 알 수 없을 때가 많습니다. 그러다가, 문득, 엄마들에게 들어오는 질문이 있습니다. ‘교회에 뭘하러 오지?’ 라는 생각입니다. 30대 ,아이를 키우는 부모들에게 찾아오는 기나긴 시험의 시간입니다. 인내가 많이 필요하고, 인내를 배워가는 시간입니다.
그렇지만, 저는 믿습니다. 주님을 만나고 싶은 갈급함, 주님이 주시는 평안에 대한 갈급함, 주님의 말씀에 대한 갈급함을 가지고 주님이 계신 곳을 찾는 모든 사람들의 마음을, 하나님이 기뻐하신다는 것을 말입니다. 어머니들을 위해 기도해 주십시오. 예배 시간에 아이들 때문에 조금 시끄러워도 좋습니다. 그래야 사람 사는 것 같지요. 주님이 계신 곳은 항상 이렇게 시끌 벅적했습니다.
[3] 사람들이 한 중풍병자를 네 사람에게 메워 가지고 예수께로 올새
주님을 만나야 하지만 소외당하고 있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주님이 필요한데, 감히 가까이 오지 못하고 있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주님이 계신 집을 상상해 보십시오. 주님을 만나고 싶은 사람들, 주님이 필요한 사람들로 넘쳐 났습니다. 그 중에는 한 중풍병자가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한 중풍 병자를 데리고 예수께 나아왔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예수를 만날 길이 없었습니다. 주님을 반드시 만나야 되는 한 사람이지만, 아무도 그에게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중풍 병자의 친구들이 사람들에게 부탁했을 것입니다. ‘제 친구가 주님을 만날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세요’라고 말입니다. 그렇지만, 주님이 계신 집에 있는 사람들은 중풍병자와 그의 친구들을 배려해 주지 않았습니다. 이유가 있었겠지요. “우리도 급하다구요. 우리도 주님을 보고 싶다구요. 우리도 주님의 말씀을 듣고 싶다’는 것이었을 것입니다.
혹시 우리의 모습은 아닌가요? 혹시, 우리 교회의 모습은 아닌가요? 주님이 정말로 필요한 사람들, 주님을 진짜로 만나야 되는 사람들에 대한 관심과 배려가 우리에게 있나요? 주님의 이름으로 우리가 모일 수 있어서 너무 좋지만.
혹시 우리가 중풍 병자와 같이 주님을 급하게 만나야 되는 사람들의 앞길을 막고 있지는 않냐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주님이 필요하지만, 주님을 반드시 만나야 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우리가 잊지 말았으면 합니다. 여러분이 아는 분 중에 그런 사람이 있나요? 중풍 환자 처럼 주님을 반드시 만나야 하는 사람. 그 사람을 위해 기도해 주시길 바랍니다.
[4] 무리들 때문에 예수께 데려갈 수 없으므로 그 계신 곳의 지붕을 뜯어 구멍을 내고 중풍병자가 누운 상을 달아 내리니
하지만 불행 중 다행스러운 일이 있습니다. 젊은 중풍 병자에게는 친구들이 있었습니다. 그것도 믿음이 좋은 친구들입니다. 친구들의 믿음은 예수께서 자기 친구의 병을 고쳐주실 능력이 있다는 것이지요. 예수를 만나기만 하면, 친구의 몸을 옴짝달싹 하지 못하게 하는 중풍이 고침 받을 것이라는 믿음 입니다. 이런 믿음이, 친구들에게 기막힌 아이디어를 생각나게 했습니다. 바로 지붕을 뜯고 친구가 누운 상을 내리는 것입니다.
예수를 만날 수 있는 길이 없으면, 길을 내서라도 예수님을 만나려고 하는 의지를 볼 수 있습니다. 이 때 당시의 집의 지붕은 네 명의 남자가 한 명의 환자를 들치고 올라갈 수 있을 만큼, 접근이 쉬웠다는 것을 알 수 있지요. 또한 지붕도 비만 새지 않도록 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따라서 친구들의 행동은 매우 도전적으로 보이지만, 친구의 병을 낫게 하겠다는 믿음을 보신 주님도 이들의 행동에 꾸짖지 않으시고, 오히려 기뻐하셨습니다. 이 일은 예수님의 제자들에게도 큰 충격이었던 것 같습니다. 중풍병자가 마태복음 9장과 누가복음 5장에도 중풍병자의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믿음 좋은 친구들이 있다는 것은 감사한 일입니다. 믿음 좋은 친구들을 많이 사귀시기를 바랍니다. 어려움이 있을 때, 함께 기도해 줄 수 있는 사람들. 슬픈 일이 있을 때 함께 울어줄 수 있는 사람들. 기쁜 일이 있을 때 함께 폴짝 폴짝 뛰면서 기뻐해 줄 수 있는 사람들. 무엇보다도, 세상 방법이 아닌, 하나님의 방법을 이해하는 사람들을 많이 사귀실 수 있도록 기도하시길 바랍니다. 그런 믿음의 친구가 여러분이 되시면 더욱 좋지요. 꼭 그렇게 되시길 바랍니다.
(막 2:5, 개정)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작은 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예수님께서는 네 친구들에게 실려 온 중풍병자를 고쳐주십니다. 단순히 육체적인 병만이 아니라 죄사함까지도 받았습니다.
(막 2:11, 개정)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니
예수님은 이 사람의 육체적 상황이 근본적으로 영적인 원인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말씀을 통해 보여주시면서 동시에 그 중풍병자를 ‘작은자야’ 라고 부르셨습니다. 그가 예수님의 말씀대로 침상을 들고 밖으로 나가자 무리들은 매우 놀라서 어쩔줄 몰라했습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은 메시야, 그리스도가 오시면 죄의 용서를 받게 될 것이라고 거듭 강조했었기 때문에 이 말씀은 엄청난 은혜이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을 수 없는 사건이었습니다.
(막 2:12, 개정) 그가 일어나 곧 상을 가지고 모든 사람 앞에서 나가거늘 그들이 다 놀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이르되 우리가 이런 일을 도무지 보지 못하였다 하더라
[6] 어떤 서기관들이 거기 앉아서 마음에 생각하기를 [7] 이 사람이 어찌 이렇게 말하는가 신성 모독이로다 오직 하나님 한 분 외에는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
1장 22절에서 마가는 예수님의 가르치심이 서기관들과 같지 않다고 기록했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치심에는 ‘권위’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가르치심에 놀랐다고 기록합니다.
서기관들은 성전에서 제사장들의 예배를 돕던 사람들입니다. 점차 그들은 백성의 율법 준수에 관한 질문들을 해결해주는 역할을 맡게 되었습니다. 모세의 율법과 포로기 이후 생긴 조상들의 구전에 정통한 백성의 지도자들이 이었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 5장 17절에서는 이들이 갈릴리 각 촌과 유대와 예루살렘에서 왔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단순한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온 것이 아니라 시비걸고 책잡기 위해 앉아 있음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들의 눈에 예수님은 평범한 한 사람이었기에 그분의 죄사함은 ’신성모독‘으로 들렸습니다. 예수님의 말씀 한마디 한마디가 그들의 마음을 불편하게 했습니다. 그들의 생각과 맞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죄를 용서하실 수 있는 분이시라는 사실은 분명 맞는 이야기였습니다. 그러나 서기관들은 이 세상에 오신 하나님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이신 그분이 이 땅에 오신다는 것은 말도 되지 않는 이야기였기 때문입니다.
[8] 그들이 속으로 이렇게 생각하는 줄을 예수께서 곧 중심에 아시고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것을 마음에 생각하느냐 [9] 중풍병자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걸어가라 하는 말 중에서 어느 것이 쉽겠느냐
서기관들의 이 불편한 심기는 얼굴표정으로 드러났습니다. 내면속의 거부감을 예수님은 아셨습니다. 그들의 마음을 꿰뚤어 보셨습니다. 그리고 질문을 던집니다. 어떤 것이 더 쉽냐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두 가지 모두 서기관들에게는 불가능한, 그곳에 모인 모든 사람들에게는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네 죄가 사함을 받았느니라 는 말과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걸어가라’ 어느것이 쉽습니까?
상을 들고 가기위해서는 치유가 있어야 하기에 말로 떼울 수 있는 ‘죄사함을받았느니라’가 더 쉬워보입니다.
일어나 걸어가는 것은 눈으로 볼 수 있는 것, 입증될 수 있는 것이기에 어려워보입니다.
[10]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11]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니
예수님은 이 질문을 통해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죄사하는 권위와 능력을 소유하고 계시는 분이심을 증명하기 위해서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라는 기적을 통해 보여주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이심을 중풍병자를 고치시는 기적을 통해 보여주고 계십니다.
[12] 그가 일어나 곧 상을 가지고 모든 사람 앞에서 나가거늘 그들이 다 놀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이르되 우리가 이런 일을 도무지 보지 못하였다 하더라
예수님의 이 기적의 사건을 마태복음은 ‘무리고 보고 두려워하며(마 9:8), ’모든 사람이 놀라.... 심히 두려워하여”(눅 5:26) 라고 표현합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게 되었다는 표현입니다. 이로인해 예수님이 바로 하나님이 보내신 자, 메시야 이심을 믿게 되었음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은 중풍병자의 근원적인 문제, 죄사함을 통해 병을 고치시고, 하나님 나라가 우리들 가운데 임했음을 선포하고 계십니다.
질병으로 고생하시는 분들에게 하나님의 치유하심이 있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의 자녀들이 잘되고, 건강하기를 기도합니다. 직장 문제로 고민하시는 분들에게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있기를 기도합니다. 가정 문제로 머리가 아프신 분들에게 하나님의 평강이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중풍 병자에게 해 주셨던 말씀입니다. ‘소자야,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 라는 말씀입니다. 여러분도 들으시길 바랍니다. 우리가 반드시 들어야 하는 말씀입니다. ‘소자야,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 ‘딸아, 아들아, 안심하라.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 (마 9:2; 막 2:5)’
이 말씀이 여러분과 제 삶에 이루어지기를 기도합니다. 아멘!
내 소원이 나를 위한 것이 되지 않도록, 나의 소원을 꿈꾸는 시간되지 않게 하시고, 하나님의 꿈을 이루는 한해 되게 하소서.
윈도우와 같은 컴퓨터 운영체제중에 무료로 배포되는 ‘우분투’라는 리눅스 버전이 있습니다. 우분투란 남아프리카 반투어로 ‘네가 있으니 내가 있다’는 뜻으로 인류애, 공동체 정신을 뜻합니다.
‘우분투’라는 인사말이 있습니다. ‘당신이 있으므로 내가 있습니다’ 라는 말입니다.
아프리카의 한 부족을 연구하던 한 학자가 나무옆에 싱싱하고 달콤한 딸기가 가득한 바구니를 놓고 누구든지 먼저 뛰어간 아이에게 딸기를 모두 주겠다고 약속합니다. 그러자 아이들은 모두 뛰어갔습니다. 그런데 약속이라도 하 ㄴ듯 손에 손을 자보 함께 달리는 것이었습니다.
바구니에 도착하자 딸기를 서로 나눠 먹으며 행복해 했습니다. 궁금해서 아이들에게 물었습니다.
“얘들아, 일등한 사람에게 모두 주려고 해는데 왜 일등을 하지 않고 손을 잡고 함께 달렸니?”
그러자 아이들이 외쳤습니다. “우분투” 다른아이들을 슬프게 하고 나만 행복해서는 안된다는 말입니다.
2019년, 혼자가 아닌 함께 걸어가시기 바랍니다. 서로가 서로의 아픔을 돌아보고, 위로해주고, 치료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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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 시 100:1-5 / 어떻게 감사해야 하나요? | 관리자 | 208 | 2019.10.01 00:04 |
39 | 요일 4:7-11절 / 사랑이 여기 있어요! / 비법, 포장된 선물 / | 관리자 | 371 | 2018.11.28 01:24 |
38 | 시 18:31-50 / 여호와 외에 누가 하나님이뇨? | 관리자 | 475 | 2018.11.28 01:24 |
37 | 행 13:1-3 / 누가 그리스도인일까? | 관리자 | 332 | 2018.11.28 01:23 |
36 | 딤전 4:6-13 / 제목: 어리다고 놀리지 마세요. | 관리자 | 386 | 2018.11.28 01:23 |
35 | 사 47:1-15 / 나뿐 소리, 예뿐소리/ 누구로 살아야 할까요? | 관리자 | 293 | 2018.11.28 01:22 |
34 | 일이 꼬여만 갈 때 아멘! 합시다./고후 1:12-22절 | 관리자 | 452 | 2018.11.28 01:21 |
33 | 시편 25:1-22절, '주를 바라보았더니' | 관리자 | 398 | 2018.11.28 01:19 |
32 | 하나님의 방법으로 일하는 사람들(슥 4:1-7) | jmr0112 | 291 | 2016.11.28 23:3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