눅 18:15-27/마지막까지 할 수 있는 것
본문: 눅 18:15-27절
제목: 마지막까지 할 수 있는 것
찬양: 516장 옳은 길 따르라 의의 길을
(눅 18:15-27) [15] 사람들이 예수께서 만져 주심을 바라고 자기 어린 아기를 데리고 오매 제자들이 보고 꾸짖거늘 [16] 예수께서 그 어린 아이들을 불러 가까이 하시고 이르시되 어린 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17]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단코 거기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18] 어떤 관리가 물어 이르되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19]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 [20] 네가 계명을 아나니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 증언 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였느니라 [21] 여짜오되 이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키었나입니다 [22] 예수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이르시되 네게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네게 보화가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 [23] 그 사람이 큰 부자이므로 이 말씀을 듣고 심히 근심하더라 [24] 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이르시되 재물이 있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25]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시니 [26] 듣는 자들이 이르되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나이까 [27] 이르시되 무릇 사람이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은 하실 수 있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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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교회는 지난해부터 새생명축제를 ‘주일학교와 함께하는 ’ 축제로 열고 있습니다. 많은 분들이 뜻을 같이하고 동참해 주고 계십니다. 왜입니까? 어린이 전도의 중요성을 알기 때문입니다. 어린이를 ‘한 영혼’으로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한국교회도, 세계 교회들도 어린이를 한 생명으로 보고 그들에게 전도하기를 시작한 것은 그렇게 오래되지 않았습니다. 그저 어른들이 교회에 올 때 함께 따라오는 아이들을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가 그들을 위한 학교를 열고, 그들에게 글을 가르치고 찬양을 가르치고, 교육하는 기관으로 주일학교를 시작했습니다. 전도의 대상으로 보기보다는 교육의 대상으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5월 1일 수요예배 설교를 하면서 저는 ‘오늘도 시작하는 사람’이라는 제목으로 요한복음 6장의 오병이어 이야기를 함께 나누면서 안드레의 이야기를 드렸습니다. 오늘은 ‘마지막까지 할 수 있는 것’ 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눠보려 합니다.
1855년 4월 21일 (164년전) 보스톤 한 구둣방에서 수선공으로 일하고있던 무디에게 한 주일학교선생님이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무디를 사랑하셔. 예수님은 무디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단다’는 복음을 전해주었습니다. 성령께서는 무디의 마음을 감동시키셨고, 자신과 같은 아이들의 영혼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때 무디의 나이는 17세 였다고 합니다. 무디는 자신이 출석하던 플리마우스 교회에 장의자 하나를 빌려 어린이 주일학교를 시작했습니다. 한 줄이 네 줄이되고, 네 줄이 100명, 300명, 1500명의 어린이들로 교회를 가득 차게 되었다고 전해집니다. 그는 신학공부를 한 신학생도, 목회자도 아니었지만 어린이들을 사랑하시는 예수님의 마음을 깨닫고 뜨거운 헌신과 열정으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의 복음에 대한 열정은 미국교회 주일학교에 영향을 주게 되었고, 어린이 복음화의 중요성을 깨우쳐 주는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매일 매일 전도집회를 하고 다니는 모습을 보며 한사람이 무디에게 이렇게 질문합니다.
“지난 밤 집회에서는 몇 명이나 구원받았습니까?”
“두사람 반입니다” “어른 두명과 어린이 한명이란 뜻입니까?”
그러자 무디는 “두명의 어린이와 한 명의 어른이지요”라고 대답했습니다. ‘아이들은 하나님께 바칠 전생애가 남아있지만 어른은 절반 밖에 안남았으니까요.’
한 어린이가 구원받을 때 한 영혼이 구원받을 뿐 아니라 한 인생이 구원받습니다.
찰스 스펄전은 15살에, 조나단에드워즈는 7살에, 메튜헨리는 11살에, 짐 엘리엇은 6살에, 헨리에타 미어즈는 5살에 구원받았다고 고백합니다. 여러분의 주변에는 어떤 아이들이 있습니까? 그 아이들은 구원받아야 할 불쌍한 영혼들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이와 같은 아이들이 등장합니다.
[15] 사람들이 예수께서 만져 주심을 바라고 자기 어린 아기를 데리고 오매 제자들이 보고 꾸짖거늘
[16] 예수께서 그 어린 아이들을 불러 가까이 하시고 이르시되 어린 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본문 15절에는 ‘어린아기’라는 표현이 나타나고, 16절에서는 ‘어린아이’라고 표현되고 있습니다. 부모의 품에 안겨온 아이, 업혀온 아이들과 이끌려 온 아이들을 말합니다. 이 아이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는지, 그저 부모님을 따라와서 빨리 집에 가자고 응석을 부렸는지는 모르겠지만 제자들은 그들의 모습이 보기에 좋지 않았고 거슬렸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꾸짖거늘’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어린 아이들을 만져주신 이야기는, 공관복음, 즉, 마태와 마가, 누가복음에 모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 기록들은, 복음서에 따라, 약간씩 차이가 있습니다.
마태와 마가의 경우에는, 어린아이들을 만져주신 이야기가, 이혼에 대한 가르침 뒤에, 기록되어 있습니다(마19:1-12, 막10:1-12). 조그만 이익과 오해로, 서로 해어지지 말고, 끝까지 온전히 믿고 따르는 어린아이 같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누가복음에는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 뒤에 기록했습니다. 자신을 스스로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진다고 말합니다.
또 마태와 마가의 경우에는, 예수님이 안수하고, 아이들을 만져주심을 기록했지만, 누가 복음에는 이 내용이 생략되었습니다. 그리고 마태와 마가의 경우는, 어린아이들(파이디아, παιδία)이 언급되었지만 누가 복음은 ‘아직 태어나지 않은 태아나, 젖먹이 유아’(브레페, βρέφη)들 이라는 용어로 ‘어린아이’를 언급된다. 누가는 ‘파이디아’와 ‘브레페’란 단어를 사용해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자의, 겸손한 모습을 더욱 강조하고 있습니다. 어린 아기(브레페, βρέφη, 블렢호스, 중성복수)는 ‘아직 태어나지 않은 태아나, 젖먹이 유아’들입니다. 젖먹이는 엄마 품에서, 젖을 먹고 자라는, 갓난아기들입니다. 젖먹이는 산모에게, 전적으로 의존하는, 무기력한 존재입니다. 어린 아이들은 아무 힘이 없으며, 그의 생명은 전적으로, 산모에게 달려 있습니다.
이 사건 앞에 기록된, 세리의 모습과도 일치합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이, 그들의 마을을 지나간다는 사실을 알고서, 저마다 자기 아이들을, 예수님에게 데리고 왔습니다. 여기서 ‘데리고 오다.’라는 동사의 시제가 ‘미완료형’입니다. 그러니까 계속, 반복해서 사람들이, 자기 아이들을 예수님에게 데리고 오고 있는 것입니다.
한 두사람이면 이해하겠는데, 그 수가 점점 늘어납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이, 자기 어린 아기들을 만져 주기를 바랐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이 자기 아기들에게 안수하고 기도해 주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그들을 꾸짖었습니다(에페티메산, 에피티마오, 책망했다, 경고했다.).
제자들은 문밖에서, 어린 아기를 데리고 온 사람들이, 들어가지 못하게 막았을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제자들과 어린 아기를 데리고 온 사람들 사이에, 실랑이가 벌어졌습니다. 그들을 꾸짖는 제자들의 언성도 높아집니다. 왜 예수님의 의 제자들은 어린 아기를 데리고 온 사람들을 꾸짖고 있을까요? 아마 사람들이 자기 아기들을 데리고 와서, 예수님을 귀찮게 만들고, 방해한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만큼 그들은, 어린 아기들을 하찮게 여겼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예수님의 마음을, 제대로 읽지 못했습니다.
(16) “예수께서 그 어린 아이들을 불러, 가까이 하시고 이르시되, 어린 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용납하고(아피에미, 보내다, 곁에 두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어린 아이들을 막는 것을 보고, 화를 내면서 아이들을 불러서, 가까이 오게 했다. 그리고 그 어린 아이들을 안아주면서 ‘그 어린 아이들이 내게로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메 콜뤼에테, 현재 명령형)입니다.
지금 하고 있는 일을, 당장에 그만 두라는 말입니다. 우리도 어린아이들을 소홀히 여길 때가 많습니다. 이러한 태도는, 예수님의 뜻과는 먼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후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가, 주변에 있던, 어린 아이들과 같이 자의 것이라고 선언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등장인물들의 시선이 어디에 머물고 있는지를 볼 필요가 있습니다.
먼저 제자들의 시선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위해 찾아오는 사람들을 향해 있습니다. 저들이 말씀을 잘 들을 수 있도록 배려하고 있습니다. 말씀을 통해 저들의 삶이 변화되기를 기대했을 것입니다. 제자들의 눈에는 ‘사람들의 영혼’에, ‘몰려드는 사람들’에 시선이 머물고 있습니다. (우리의 시선은 어디에 머무르고 있습니까?, 부모님과 함께 온 아이)
두 번째는 ‘부모들’의 시선이 있습니다. 부모님들은 자신들의 문제보다, 자신들보다 먼저 ‘자기어린아기’에 시선이 머물고 있습니다. 어떻게든 예수님께 자신의 아이가 손이라도 닿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제자들의 눈을 피하고 속여서라도 자신의 아기를 예수님께서 만져주시고 축복해주시기를 기대하는 눈으로 바라보고 있습니다.
세 번째는 ‘아이들’의 시선입니다. 아이들은 엄마와 예수님을 번갈아보여 어디로 시선을 두어야 하나 망설이고 있습니다. 꾸짖는 제자들을 보며 울먹이는 아이들의 모습이 보이십니까? 우리 새가족들의 모습이 오늘 어린아이들의 모습과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들은 무엇이 맞는것인지, 왜 이렇게 하면 안되는건지, 왜 이렇게 해야하는지도 모르는 아이와같습니다. 이들의 시선을 부모에게서, 제자들에게서 예수님께로 향하도록 도와야 하는 것이 우리의 일이 아닐까요?
마지막으로 예수님의 시선입니다. 예수님의 시선은 어디로 향해 있을까요? 16절에 그 모습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예수께서 그 어린아이들을 불러 가까이 하시고 이르시되 어린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예수님의 시선이 누구를 향해 있습니까? ‘불러 가까이하시고’라는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아이들의 시선과 눈을 맞추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왜 이 아이들과 시선을 맞추신 것일가요? 예수님의 생각과 제자들의 생각이 왜 달랐을까요?
17절에 그 해답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17]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단코 거기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어린아이들이 ‘하나님의 나라를 받아들인다’고 표현합니다. 하나님의 나라의 복음을 어린아이들이 잘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를 옆에서 듣고 있던 한 청년이 있었습니다. 18절입니다.
[18] 어떤 관리가 물어 이르되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마태는 어떤 사람, 청년으로, 마가는 재물이 많은 ‘한사람’으로 누가는 부자인 ‘어떤 관리’로 소개합니다. 그는 유대지도자로서 재물이 많은 청년이었음을 알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부자청년을 공관복음에서는 모두가 어린아이를 축복하고, 어린아이를 통해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자가 어떤자인지를 말씀하신 후에 동일하게 기록하고 있는 것일까요?
분명한 의도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천국에 들어갈 자, 구원받을 자, 영생을 얻을 자 인가 하는 것을 말씀하고 싶어 하시는 것입니다.
교회의 사명이 무엇입니까? 우리의 주변이웃들이, 나와 가까이 있는 사람들이 나 때문에 ‘구원의 문제와 영생의 문제’에 관심을 갖게 하는것입니다. 교회를 통해 예수그리스도를 전파하는 것입니다.
교회 주변에 살다보면 자연스럽게 교회다니는 사람들이 믿는 것이 무엇인지, 왜 교회에 오라고 하는지, 왜 이런 행사들을 하고 있는건지 그 의미를 궁금해 하게 만들고, 한번 가보고 싶어하도록 하는 것 그것이 오늘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예수님은 어린아이들을 축복하시며 안아주시면서 아이들에게도 교훈하고 있지만 이를 보고 있는 사람들에게 천국에 대해 영생에 대해 궁금하도록 만들고 계십니다. 관심을 갖게 하고 있습니다.
교회주변에 몇 년을 살았는데도 아직 한 번도 복음을 듣지 못했다면 우리는 우리의 사명을 다하지 못한 것이 아닐까요?
오늘 이 부자청년은 어린아이를 보면서 자신은 그 아이보다 낫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5,6세만 되어도 율법을 공부하고 암송했기 때문에 이 청년도 자신의 행위에 대해, 지금까지의 삶에 대해 자신이 있었습니다. 그는 예수님께 칭찬듣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질문합니다. 그래서 그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 행위에 대해서 질문합니다.
18절“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예수님은 그의 질문의 의도를 아시고 십계명의 계명중에서 하나님과의 관계부분을 빼고 인간관계부분만 언급하십니다.
20절. “네가 계명을 아나니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증언하지 말라, 네부모를 공경하라 하였느느니라”
청년은 자신있게 대답합니다. “이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키었나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의 행위를 칭찬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그를 향해 22절“네게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 즉, 가난한 자든 부한자든, 배운 사람이든 못배운 사람이든, 있는자나 없는자나 배고픈사람이든 배부른 사람이든 왕이든 종이든 남녀노소, 빈부귀천을 떠나 모든 인류가 가지고 있는 공통적인 고민이 바로 ‘영생’에 대한 고민일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참 해결되지 않는 문제입니다.
돈있는 사람들은 돈을 벌기위해 애쓰고, 또 어떤 사람은 선행을 함으로 애씁니다.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을 위해 평생을 헌신하며 자신을 희생하기도 합니다. 속세를 떠나 평생 도를 닦기도 합니다. 심지어 마약과 술을 통해 영생의 기쁨과 같은 희락을 얻고자 해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인간의 어떤 노력으로도 해결되지 않는 문제, 그것이 바로 영생의 문제입니다.
부자청년은 영생을 얻기 위해 정말 많은 노력을 했습니다. 이것저것 많은 것을 갖췄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부족하다고 말씀하시는 것일까요?
요즘 청년들이 취업을 위해 참 많이 노력합니다. 갖가지 자격증을 취득하기도 하고, 스펙을 쌓기 위해 매일 매일 힘겹게 살아갑니다. 그런데도 인사담당자들은 아직도 부족하다고 말합니다. 뽑을 만한 인재가 없다고 말합니다. 도대체 무엇이 부족하다는 말입니까?
마치 그 모습이 생각났습니다.
네게 있는 한가지 부족한 것 때문에 너는 영생얻기가 힘들겠다고 말씀하십니다. ‘
‘한가지 부족한 것’ 이 무엇일까요? 그런데 이 단어는 ‘네게 한가지 남은 것’이란 의미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네 손에 움켜쥐고 있는 것’, ‘네가 놓지 못하고 있는 것’ 그것이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청년은 자기가 마지막으로 움켜쥐고 있는 그것, 지금까지 자신의 스펙을 쌓기 위해 준비했던 그것을 포기하지 못했습니다. 이것은 다른 어떤것들은 포기할 수 있어도 이것만은 포기할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주시겠다고 하시는 ‘보화’의 가치보다 더 큰 것이었습니다.
성경은 그것을 23절에서 이렇게 기록합니다.
“그 사람이 큰 부자이므로 이 말씀을 듣고 심히 근심하더라”
예수님께 뒷모습을 보이며 처량히 떠나가는 이 청년의 이야기를 낙타 이야기를 하시며 안타까워하십니다.
24-25절“재물이 있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예수님은 부자청년에게 부족한것이라고 말씀하셨는데, 부자에게는 ‘넉넉한 것’이 었으며 ‘남을만큼 충분한 것’이었습니다.
오늘 여러분에게 이와 같은 것은 없습니까? 나에게는 남을 만큼 충분하고 넉넉한 것인데, 주님이 보실때는 부족한 것이 되어버리는 그것, 그것을 오늘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그것을 주님앞에 내려놓으시기 바랍니다.
사데교회는 ‘한가지 부족한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영적으로는 죽게 된 상태에서 회개하여 살아나지 않고 더러운옷을 입은채 그대로 있느 ㄴ것이었습니다.
라오디게아교회는 당시 소아시아 일곱교회중에 가장 큰 교회였고, 헌금도 가장 많이 걷히고, 교회 활동도 활발한 교회, 일주일 내내 각종 모임이 가득한 교회였습니다. 그러나 영적으로는 뜨겁지도 않고 차지도 않은 미지근한 교회였습니다. 곤고하고 가련하며 가난하고 눈이 멀었으며 벌거벗은 초라한 모습 이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새생명축제를 준비하면서 한 가지 부족한 것은 무엇일까요?
나에게, 우리가정에 한 가지 부족한 것은 무엇일까요? 그 부족한 것은 나의 넉넉하다고 생각하는, 부족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그곳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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