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적인 신앙, 혹은 신앙의 신비 -소망교회 김지철 목사-

관리자 | 2014.09.15 20:50 | 조회 273 | 공감 0 | 비공감 0
개혁적인 신앙, 혹은 신앙의 신비 -소망교회 김지철 목사-

정적 설교, 동적 설교
소망교회는 10월 첫째 주일로 교회창립 29주년을 맞는다. 김지철 목사(이하 김 목사)가 2005년 10월23일 주일예배 설교에서 “나는 우리 소망교회에 5만, 6만 성도들이 평생에 한번 내지는 두 번 선교 현장을 방문해 보면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하고 언급한 걸 보면 교회의 규모를 대략 짐작할 수 있다. 채 30년이 안 된 교회가 5,6만 명의 교세라니! 소망교회가 이렇게 놀라운 기세로 성장하게 된 데에는 원로이신 곽선희 목사의 설교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지성적인 설교자로 한국을 대표하는 곽선희 목사의 후임자로 소망교회에 부임한 김 목사의 설교 역시 큰 틀에서 같은 색채이다. 대도시 중산층 지성인들의 모범적인 신앙을 근본  목표로 하는 소망교회의 설교가 대를 이은 셈이다. 두 설교자의 비교연구는 오늘 평자의 몫이 아니니까 접어두고, 김 목사의 설교만 따라가겠다. 평자는 김 목사가 2005년 1월2일 첫 주일 부터 12월25일 마지막 주일까지 소망교회 주일공동예배에서 행한 설교 52편을 기본 텍스트로 삼았다.
김 목사의 설교는 전체적으로 일단 유연하다. 개인적인 친분이 전혀 없는 분이기 때문에 단정적으로 말할 수는 없지만 김 목사의 성격 자체가 이처럼 유연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여기서 유연하다는 말은 단지 부드럽다는 의미가 아니라 설교에 흐름과 맥락이 뚜렷하다는 뜻이다. 소리만 요란할 뿐이지 실제로는 정적(靜的)인 설교가 있고, 차분하지만 동적(動的)인 설교가 있는데, 김 목사는 물론 후자이다. 돌고래의 유영과 같다고 할는지, 갈매기의 비상과 같다고 할는지, 그의 설교는 맥이 끊이지 않는다.
형식적으로 볼 때 그의 설교는 나열식이 아니라 에세이식이다. 그는 설교의 핵심 주제를 작게 나누어 나열하지 않고 큰 묶음으로, 하나의 통으로 구성하기 때문에 설교의 결이 살아 움직인다. 가장 전통적이고 일반적인 나열식 설교의 문제에 대해서는 평자가 직간접적으로 여러 번 언급한 적이 있기 때문에 여기서는 길게 끌지 않겠다. 설교의 큰 주제 밑으로 몇 개의 소주제를 나열하는 설교는 일단 설교 준비와 효과라는 점에서 나름으로 장점이 있는 건 분명하지만 이런 식의 설교는 토막으로 끊어질 가능성이 많기 때문에 설교의 주제나 성서 본문이 매우 특별한 경우에 한정되어야 한다. 평자가 보기에 김 목사의 설교는 진부한 나열식과는 차원을 전혀 달리하는 에세이 형식의 한 전형이다.  
김 목사의 설교가 유연하다는 말은 내용적인 차원에서 훨씬 두드러진다. 그의 설교 내용은 처음부터 끝까지 한 호흡으로 연결된다. 이런 설교는 수미일관된 흐름을 유지하기 때문에 설교 현장에 참석한 사람들이 숨 한번 쉬는 느낌으로 설교를 듣게 된다. 우리의 영혼을 사로잡는 글을 읽을 때 시간이 한 순간에 지나간 것 같은 경험을 하게 되는데, 그 이유는 그 글이 동적인 흐름을 확보했다는 데에 놓여 있다. 김 목사의 설교는 기본적으로 그런 특성이 있다.
여기서 설교의 동적인 흐름이라는 게 도대체 무슨 뜻인가? 비유적으로 설명해보자. 같은 물이라 하더라도 호수에는 흐름이 없지만, 있다하더라도 자체 안의 순환 반복에 머물지만, 냇물이나 강에는 흐름이 있다. 이런 흐름에서 동력이 발생하고 그 동력으로 전기를 일으킬 수도 있다. 땅도 마찬가지이다. 운동장은 아무리 넓은 땅이라 하더라도 흐름이 없다. 그러나 길은 그렇지 않다. 마을과 마을을 이어주는 길은 흐름이 있다. 흐름이 끊기지 않아야 길이다. 이처럼 설교의 내용이 강과 길처럼 흐름을 확보해야만 영혼의 울림이 일어날 수 있다.
이렇게 동적인 흐름을 유지하는 설교에는 일종의 모험이 따른다. 청중들이 중간에 잠시 졸거나 딴 생각을 하다가 맥락을 놓치면 설교를 따라갈 수 없다는 사실이 그것이다. 이에 반해 흐름이 없는 설교는 각각의 주제들이 서로 분산되어 있기 때문에 청중들이 설교 내용을 중간에 놓쳤다가 다시 들어도 설교를 알아듣는데 아무런 지장이 없다. 성서와 신앙의 깊이를 경험하고, 신학적 사유의 세계를 인식하고 있는 설교자라고 한다면 기꺼이 이런 모험과 만나는 걸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런 방식이 아니라면 깨어있는 청중들의 영혼에 공명을 일으킬 수 없기 때문이다.

격조 높은 설교
이 글쓰기 초장부터 사설(辭說)이 너무 길었던 것 같다. 김 목사가 설교를 이끌어가는 그런 흐름을 구체적으로 설명하기가 힘들어서 어쩔 수 없이 강의조의 글이 되고 말았다. 이제 속도를 좀 내야겠다. 얼마나 가능할지 모르겠지만 이 문제를 김 목사의 설교와 직접 연관해서 설명해보자. 거의 모든 설교가 그런 흐름을 타고 있었는데, 그중의 한편인 “아브라함의 믿음을 배우라”(1월23일, 롬 4:17-22. 이하 월일만 표기)는 아래와 같이 진행되었다.
김 목사는 삶의 문제가 바른 신앙에 달려 있다는 뜻으로, 사람들의 정신질환이 거의 종교 문제라는 칼 융의 연구를 서론으로 제시하면서 “어떻게 해야 우리는 참된 신앙에 이를 수 있는 것일까요?” 하고 묻는다. 이어서 그는 오늘의 그리스도인들의 믿음이 하나님의 말씀이나 하나님의 신실성에 기초를 두지 않는 현상을 차분하게 풀어나갔다. 가장 우선적인 현상은 감정적인 면에 신앙의 기초를 두는 것이다. 김 목사가 보기에 이런 신앙은 위험하다. 왜냐하면 인간의 감정은 변덕이 심하기 때문이다. 또 다른 형태는 인간의 신념에 기초를 두는 것이다. 그것도 바른 신앙이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그 약속에 기초하는 것이 바른 신앙이라는 사실을 그는 명확히 했다.

신념이란 자기의 생각과 자기의 주장에 기초합니다. 좀 거창하게 표현한다면 사상적인 이데올로기를 수용하고 신봉하는 것이 신념 체계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믿고 있는 신앙은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신앙은 하나님의 약속에 우리의 모든 것을 기초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신앙의 대상입니다. 아니, 그 말씀을 하시는 신실하신 창조주 하나님,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 하나님께서 우리 신앙의 대상인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믿는 사람들은 그 말씀과 약속하시는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12월23일)

신앙의 대상을 정확하게 제시한 김 목사는 이런 신앙의 모범을 성서 본문이 제시하고 있는 아브라함에게서 찾는다. 아브라함은 “전혀 소망을 가질 수가 없는 상황”에서 바라고 믿었다. 왜냐하면 그에게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신뢰가 있었기 때문이다. 믿음은 인간의 결단이 아니라 오히려 “나로 하여금 믿게 해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따라서 김 목사에 의하면 “하나님의 약속을 뒷받침해 주는 증거가 현실 속에서 아무 것도 없는 그 순간에 오히려 전적으로 신실하신 하나님을 믿는 것, 그것이 하나님께서 정말 사용하고 싶은 사람들의 믿음인 것입니다.”
김 목사는 여기서 청중들에게 질문한다. 아브라함은 이런 믿음을 단번에 가질 수 있었을까? 그렇지 않다. “아브라함도 신앙 속에서 헤맸습니다.” 아흔 아홉 살에 아들을 약속받았을 때 아브라함은 허탈하게 웃었고, 사라도 따라서 웃었지만 하나님은 ‘웃음’이라는 뜻의 이삭을 그들에게 허락하심으로써 아브라함의 믿음을 확실하게 만들어주셨다. 우리의 믿음도 온전하지 못하지만 하나님을 신뢰하면 하나님은 우리의 삶에 새로운 역사를 일으키신다는 것이다.
위의 설교에는 김 목사의 설교를 추동하는 몇 가지 특징이 그대로 드러난다. 우선 그는 청중들이 보편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해석학적 근거들로부터 설교를 시작했다는 사실이 그것이다. 칼 융의 정신분석에 의한 종교적 요청으로부터 자연스럽게 현대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에 대한 반성이 분석된다. 위에서 설명한대로 그는 인간 삶의 내면적인 세계를 지배하는 바른 신앙의 토대가 인간의 감정과 신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과 그 말씀의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짚음으로써 개혁신학의 전통을 확보했다. 이 두 가지 요소, 즉 인문학적 보편성과 신앙적 특수성은 그의 다른 설교에서도 일관되게 나타나는 해석학적 토대들이다. 보편성과 특수성이 변증법적으로 그의 설교 안에서 작동함으로써 설교의 동적인 흐름을 가능하게 만들어주었다.
또 하나의 다른 특징은 김 목사가 인간을 현실적으로 이해한다는 것이다. 그는 아브라함을 신앙의 모범으로 제시하면서도 그 신앙의 한계를 놓치지 않는다. 이에 근거해서 오늘 우리의 신앙이 보이고 있는 그 현실적인 한계도 숨기지 않는다. 그는 현실을 무시하거나 부정하는 열광주의와는 거리가 멀다. 우리의 믿음조차도 역시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사실을 정확하게 제시하는 김 목사의 설교 앞에서 자신의 신앙적 실존을 정직하게 들여다볼 줄 아는 청중들은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자기 자신을 하나님의 손에 온전히 맡겨야 한다는 아래와 같은 결론 앞에서 ‘아멘’으로 답할 것이다.

여러분, 여러분이 갖고 있는 문제가 아무리 많아도 그 문제만 가지고 씨름하지 말고, 그 문제를 다 내려놓으십시오. 그리고 “저는 제 인생의 우선권을 주님으로 삼겠습니다. 그리고 신실한 주님께서 약속하시는 대로 제 인생을 살아가겠습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하나님의 사람으로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1월23일)

평자가 보기에 다른 설교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나는 현상이지만, 위의 설교도 역시 물 흐르듯이 자연스럽게 진행되었다. 어느 한 곳 지나친 비약이 없고, 어느 한 곳 억지가 없다. 청중들의 지성과 성서 텍스트의 바른 해석을 매개로 해서 결국 바른 신앙고백으로 이끌어가는 그 과정에 전혀 무리가 없는 설교였다는 말이다. 믿음을 일방적으로 강조하고, 처세술에 불과한 내용을 복음인양 선포하며, 또는 설교자의 주관적인 신앙과 기분에 따라서 설교의 내용과 흐름이 들쑥날쑥 하는 오늘의 강단 현실에서 볼 때 김 목사의 설교는 분명히 격조가 높다. 이런 설교 앞에서 평자는 깊은 가을 황혼녘에 차를 마시며 슈베르트의 <겨울 나그네>를 감상할 때처럼 내면으로부터 평안과 행복감을 경험할 수 있었다.

신앙의 존재론적 능력
동적인 흐름과 건전한 신앙을 통한 격조 높은 설교라는 사실만으로 평자가 김 목사의 설교에서 영적인 평안을 느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여기에는 그리스도교 신앙에 관한 훨씬 본질적인 다른 이유가 있다. 그것은 김 목사가 그리스도교 신앙을 존재론적인 차원에서 접근한다는 것이다. 그에게 신앙은 소유가 아니라 존재이다. 그것을 명백하게 알고 있는 설교자는 청중들을 닦달하지 않으며, 청중들을 도구적으로 다루지도 않는다. 청중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존재론적으로 만날 수 있도록, 그래서 성령이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도록 신앙의 본질에만 모든 설교와 목회의 중심을 둘 뿐이다. 김 목사는 청중들이 감당할 수 없는 것을 요구하는 일이 없다. 다른 목사들은 신자들이 교회 봉사에 힘이 부친다고 호소하면 믿음을 갖고 더 열정적으로 봉사하라고 다그칠 텐데, 그는 쉬라고 한다.(11월6일) 왜 그런가? 교회 일보다도 한 영혼의 자유와 평화가 존재론적으로 우선하다는 사실을, 그리고 신앙은 그런 외면적인 행위가 아니라 내면적인 존재의 차원이라는 사실을 그가 알고 있기 때문이다. 존재론적 우선권에 대한 그의 언급을 들어보자.  

그냥 내게 주어진 내 모습 이대로 즐기세요. 나와 사랑하는 사람이 함께 있다는 것, 그것 자체로 즐거워하고 기뻐하세요! 홀로 간다면 그것 자체로 즐거워하세요. 부부가 함께 하면 부부가 함께 가는 것으로 즐거워하세요. 자녀들과 함께 가면 자녀가 함께 가는 것으로 즐거워하세요.(7월17일)

어떤 조건이나 업적, 위치나 형태가 아니라 현재 주어진 일상 자체로 즐거워할 수 있는 삶보다 더 귀한 삶이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없다. 이게 바로 그리스도교 신앙의 본질이지만 상당히 많은 설교자들은 이런 존재론적인 신앙의 깊이보다는 일상의 조건을 향상시키는 것에 설교의 무게를 두는 경우가 흔하다. 성공지상주의, 물질만능주의, 학벌주의가 교회 안에서도 매우 강고한 이데올로기로 작용하고 있는 실정이다. 때로는 노골적으로, 때로는 은밀하게 이런 성공주의를 부추기는 설교가 우리의 강단에서 대세를 형성하고 있다. 김 목사는 기본적으로 이런 성공지상주의를 거부한다.(5월1일) 그리고 기회가 닿을 때마다 그리스도교 신앙이 소유가 아니라 존재의 차원이라는 사실을 역설한다.

신앙의 기쁨은 눈물의 현실을 모르기 때문에 갖게 되는 천박한 슬픔이 아닙니다. 많은 것을 갖고 있기 때문에 단순히 기뻐하는 소유적인 기쁨도 아닙니다. 하나님만으로 만족하고, 하나님께서 이 모든 것을 은총으로 주셨다는 사실을 깨닫는 기쁨입니다.(4월3일)

독자들은 위의 진술을 매우 일반적인 것으로 느낄 것이다. 김 목사만이 아니라 다른 많은 설교자들도 위의 내용과 비슷한 설교를 한다고 말이다. 그럴지도 모른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고전 4:20)는 바울의 가르침에서 알 수 있듯이 신앙의 존재론적 능력은 단지 말을 그럴듯하게 할 수 있다는 데 놓여 있는 게 아니다. 불립문자는 이런 사태를 정확하게 가리킨다. 말은 흉내를 낼 수 있지만 능력은 흉내를 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말이 능력과 전혀 상관없는 것도 아니다. 말과 능력은 변증법적인 상호성을 맺는다. 말은 그 사람의 내면세계에서 충분히 소화되어 삶의 능력으로 드러나며, 그 능력은 말을 통해서 심화된다. 말과 능력의 통시와 통전은 곧 “말씀이 육신”(요 1:14)이 되는 성육신을 가리키며, 동양의 개념으로 설명한다면 돈오(頓悟)이다. 어떤 설교자가 무슨 말을 했을 때 우리는 그 안에 이런 능력이 담겨 있는지 살펴보아야 한다. 설교라 하더라도 빈말, 심지어는 거짓말도 많은 법이다. 평자가 보기에 김 목사는 신앙의 존재론적 차원을 이렇게 말과 능력의 일치 차원에서 충분히 인식하고 그것을 설교로 형상화하고 있다. 이에 대한 적나라한 근거를 조금 더 보충해야겠다.  
그리스도교 신앙의 존재론적 우선권을 강조하는 김 목사의 생각은 어떤 점에서는 근본주의적으로 보일 정도로 매우 엄중하다. 존재가 악일 경우에는 비록 겉으로 선처럼 보이는 것이 나온다 하더라도 그것은 악이라고 한다. “악은 누가 뭐라고 해도 악이고, 선은 누가 뭐라고 해도 선이라고 하는 분명한 판단”(6월5일)이 필요하다는 그의 주장은 아모스 선지자의 신탁처럼 과격한 경지에 들어섰다는 의미인지 모르겠다.

폭력과 살인과 전쟁이 많은 사람을 한편으로 구하고 새 질서를 가져준다고 하더라도 인간의 존엄성을 파괴하는 폭력, 살인, 전쟁, 그 자체가 선의 수단일 수는 결코 없다는 말씀입니다. 독재가 일시적인 경제부흥을 일으키고 안정과 여유를 가져다준다고 해서 인간성을 말살시키고 인격을 무시하는 독재가 결코 선일 수는 없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우리의 삶에 이런 잘못된 예를 그냥 받아들이면서 사는 경우가 너무나 많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말씀조차도 상대화시키는 잘못된 길을 가기도 합니다.(6월5일)

김 목사는 인간과 그 안에서 작동하는 악의 존재론적 세력을 정확하게 통찰하고 있다. 겉으로는 정의와 평화를 외치지만 그 중심이 악할 경우에 그것은 결코 선할 수 없다는 그의 논리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연역해볼 수 있다. 테러방지와 세계평화라는 명분으로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를 무력으로 침공한 미국은 존재론적으로 선과는 거리가 멀다. 지금도 진행되고 있는 그 전쟁으로 군인들만이 아니라 수많은 민간인들이 죽고 장애자가 되었으며, 가족을 잃고, 최소한의 생존 조건을 박탈당했다. 테러가 줄어들지도 않았고, 평화가 확장되지도 않았다. 상황은 오히려 거꾸로 가고 있다. 전쟁이 언제 끌날지도 모른다. 미국의 부시 대통령 근처에는 십자군 전쟁을 부추기는 목사들만 있지 김 목사와 같은 설교자가 없다는 말인지. 박정희 전(前)대통령의 경우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김 목사가 직접 언급하지 않았지만, 김 목사의 존재론적 우선성에 근거하면 아무리 경제 발전을 일으켰다고 하더라도 인권을 유린한 박 대통령은 “결코 선일 수 없다.”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생각하는 우리와 달리 김 목사의 존재론적 신앙의 깊이는 매우 준엄하며, 통렬하다.

교회의 사유화와 귀족화
신앙의 존재론적 지평을 엄격하게 추구하는 김 목사는 교회개혁의 문제에서도 이런 기조를 그대로 유지한다. 기복주의는 “하나님을 자기 삶의 수단으로 이용한 것”이기 때문에 위험하다.(2월27일) 그는 “새벽기도회를 나온다고, 주일예배를 나와 성전에 앉아 있었다고 나의 신앙과 나의 구원이 보장되는 것은 결코 아니”라고 주장한다.(10월2일) 예배 장소가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이 핵심이라는 예배의 존재론적 차원을 실질적으로 꿰뚫고 있지 않으면 이렇게 분명하게 언급할 수는 없다. 이런 점에서 김 목사는 존재론적 원칙주의자라 할 수 있다. 그는 신자들에게 이렇게 묻는다. “하나님의 눈도장을 받기 위해서 이 자리에 혹 앉아있지는 않습니까?”(10월2일) 하나님의 눈도장이 아니라 목사의 눈도장을 받기 위해 교회에 나오는 신자들도 없지 않을 것이다. 그는 토저 목사의 책을 인용하면서 예배의 훼손을 경고하고 있다.

A.W. 토저 목사는 <예배인가? 쇼인가!>라는 책에서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경탄과 두려움이 사라진 채로 예배를 드리게 될 때 그것은 예배로서의 모든 가치가 사라지고 쇼처럼 바뀐다고 위험성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하나님을 위해서 예배드리는 것이 아니라 내 자신의 만족을 위해서 예배드리기 때문에 그렇습니다.(10월2일)

한국교회에서 소위 “열린 예배” 형식을 통해서 예배가 사람들에게 볼거리와 들을거리를 풍부하게 제공하는 일종의 종교적 엔터테인먼트로 기능하기 시작한지 오래되었다. 몇몇 교회는 이런 방식으로 ‘대박’을 터뜨렸고, 우연하게 일어난 그런 결과들을 얻기 위해 수많은 교회들이 가랑이가 찢어지는 줄도 모르고 숨 가쁘게 좇아가고 있다. 신앙의 존재론적 능력에 의존하는 김 목사의 눈에 이런 예배는 분명히 ‘쇼’다. 그는 인간의 만족을 채워주는 게 아니라 삼위일체 하나님에게 진정한 영광이 돌려지는 예배를 회복하고자 애를 쓰고 있다.
신앙개혁과 교회개혁에 대한 김 목사의 생각을 종교개혁 주일에 행한 “예수님의 종교개혁”(10월30일)이라는 설교에서 조금 더 확인해보자. 그에 의하면 개혁은 기본적으로 신학적이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왜냐하면 교회의 옳고 그름의 기준은 상식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이다. 이런 신학적 토대에서 볼 때 교회 개혁의 우선순위는 교회의 주인이 누구인가에 대한 방향정립이다. “교회의 주인은 목사가 아닙니다. 교회의 주인은 장로가 아닙니다. 교회는 목사나 장로의 사유물이 아닙니다. 한국교회가 갖고 있는 위기, 한국교회가 갖고 있는 치명적인 문제는 하나님의 교회를 사유화하는 것에 있습니다.” 김 목사에 의하면 오늘 교회의 직분을 맡은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고난보다는 오히려 영광을 추구한다. 그들은 교회에서 “귀족화”의 길을 가고 있다. 교회 지도자들을 향한 그의 질책은 도스토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 나오는 “대심문관”의 한 대목처럼 날카롭다.

예수님은 3년의 공생애 기간 동안에 민중을 비판하신 적이 없습니다. 고난 받고, 외롭고, 병들고, 가난하고, 그래서 세상 사람들에게 조롱받는 민중들을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지도자를 강력하게 비판하십니다. 하나님의 자리에 앉아서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지도자들에게 예수님이 묻습니다. “네가 하나님이냐? 네게 모든 재판관을 다 주었느냐? 네가 스스로 변할 생각은 안 하면서 어떻게 다른 사람을 정죄하고 변화시킬 생각을 하느냐?”(10월30일)

김 목사는 교회 개혁의 문제를 정확하게 짚었다. 교회 사유화와 지도자들의 자기영광이 바로 교회의 본질을 훼손하는 가장 큰 걸림돌이다. 이 문제는 이미 드러날 만큼 충분히 드러났기 때문에 평자는 더 이상 왈가왈부하지 않겠다. 여전히 교회의 세습 문제와 교권문제가 심각하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평자는 김 목사의 교회 개혁관이 아주 극단적이라는 사실을 확인하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의 어조는 부드럽지만 그 내면의 논리는 과격하다. 원래 하나님 나라의 복음은 과격한(radical) 법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 모습을 가만히 읽고 있노라면 예수님은 혁명가이십니다. 개혁가로는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혁명가입니다. 예수님은 공생애 당시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였다고 선포하셨습니다. “세상의 왕은 왕이 아니다. 로마 제국이 제국이 아니다.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진정한 새 나라가 올 것이다. 바로 그것의 왕은 하나님이시다.” 이렇게 선포하신 분이 예수님이셨습니다.(10월30일)

21세기 한국교회의 개혁을 위한 김 목사의 역할이 기대된다. 요즘 많은 교회들이 100년 전 평양을 중심으로 일어났던 영적 대부흥을 재현하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지만, 오늘 우리에게 실제적으로 필요한 작업은 김 목사가 추구하고 있는 진정한 교회개혁이다. 혁명가로 볼 수밖에 없는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근거해서 교회의 근본적인 틀을 바꿔야 할 것이다. 김 목사에 의하면 그 핵심은 바로 교회 사유화와 지도자들의 자기 영광을 허무는 일이다. 이 시대에 명실상부한 교회개혁의 물꼬를 누가 틀 것인가? 그런 날이 우리 세대에 올 것인가? 이런 일에 김 목사가 어느 정도의 마음을 두고 있는 평자는 전혀 알 길이 없다. 한국을 대표하는 소망교회의 담임 목사가 기도하는 마음으로 이런 일에 뛰어든다면 한국교회의 역사가 크게 바뀌지 않겠는가. 다행히 김 목사에게는 그럴만한 신학적 토대와 신앙적 열정, 그리고 소망교회라는 배경이 있다. 더구나 대형교회 담임 목사이면서도 역사적 안목과 신선미를 갖추고 있다. 그는 한기총과 사회의 보수집단들이 서울 시청 앞 광장에서 여러 번 개최한 모임에 참석하지 않은 걸로 안다. 명목으로는 기도회이지만 실제로는 매우 정치적인 이런 모임에 이름을 내는 목사들과 달리 김 목사는 소신 있게 개혁과 변화의 길을 가고 있는 것 같다. 한국교회의 개혁을 위한 카이로스를 기다리고 있는 중인가?

사랑의 기술(?)
평자의 생각에 김 목사는 이런 일에 스스로 급하게 뛰어들지는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에게는 민중신학적인 정서가 느껴질 정도로(9월11일, 10월31일) 현실변화에 대한 문제의식이 투철하지만 급격한 변화보다는 학습을 통한 점진적인 변화를 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가 생각하는 것처럼 교육을 통한 변화와 개혁도 가능할 것이다. 아니 근본적인 개혁은 그런 학습을 통해서 일어날지 모른다. 그러나 여기에는 매우 미묘한 신학적인 문제가 놓여 있다. 이는 곧 인간변화가 교육에 달려있는 것인지, 아니면 하나님을 향한 원초적 경험에 달려있는 것인지에 대한 문제이다. 우선 김 목사의 설교가 인간변화의 교육적 차원을 얼마나 진지하게 강조하는지를 살펴보아야겠다.
김 목사는 2005년 52주 동안 4번에 걸친 시리즈 설교를 했다. 첫째는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에 대해서,(2월27일-6월26일) 둘째는 야곱에 관해서,(7월24일-9월4일) 셋째는 교회론에 관해서,(9월25일-11월6일) 넷째는 탕자의 비유이다.(11월27일-12월18일) 성탄절을 비롯한 몇 중요한 절기 설교를 제외한다면 거의 반이 시리즈 설교인 셈이다. 평자의 생각에는 이런 시리즈 설교보다는 교회력을 따르는 설교가 장기적으로 볼 때 훨씬 더 바람직하지만, 김 목사는 약간 다른 방식을 선택했다. 어쨌든지 그가 시리즈 방식으로 설교한 이유는 신자들의 신앙교육을 중요하게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는 신자들의 변화 가능성을 내다보고 부단히 반복적으로 학습시키고 있었다. 반복과 훈련이 얼마나 중요한지에 대해서 그는 이렇게 역설한다.

그런데 이 순종이라는 것이 쉽지가 않습니다. 어느 누구도 선천적으로, 저절로, 오토매틱으로 순종할 수 있는 사람은 없는 것입니다. 때로는 어렵습니다. 때로는 힘듭니다. 그래서 자기 절제가 필요합니다. 훈련이 필요합니다. 반복이 필요합니다. 자기 성품이 될 때까지, 자기 삶의 습관이 될 때까지 반복하는 참다운 순종의 사람이 될 때에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그때부터 사용하실 수가 있는 것입니다.((1월30일)

“자기 성품이 될 때까지, 자기 삶의 습관이 될 때까지 반복하는” 신앙생활을 가르치기 위해서 김 목사는 절치부심한다. 그는 신앙과 삶의 모든 세세한 항목까지 일일이 가르치려고 애를 쓴다. 심지어 그는 신자들에게 자녀교육에 관한 구체적인 지침을 내린다. “5월, 늦어도 6월까지는 자녀들과 1:1 데이트를 하시기 바랍니다. 집단 데이트는 안 됩니다.”(5월1일) 자녀들과 대화할 때 잔소리는 하지 말고 95%는 들으라고 호소한다. 보모에게 효도하라고 권고하고, 특히 말을 가려서 하라는 언급은 흔하다.(4월17일) 그는 앞으로 소망교회 신자들이 교회 안의 봉사만이 아니라 교회 밖의 봉사에 참여할 수 있는 ‘자원봉사 시스템’을 가동할 준비를 하고 있다.(9월11일) 이런 모든 것들이 교육을 통한 점진적인 변화를 모색하려는 김 목사의 목회철학의 산물이다. 평자는 김 목사의 설교에서 청중들을 가장 모범적인 신앙인으로 육성해내려는 열정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스도교 신앙이 교육과 훈련을 통해서 성숙해진다는 김 목사의 생각에 평자는 기본적으로 동의하며, 최소한의 상식도 통하지 않는 한국교회의 현실에서 볼 때 김 목사의 교육목회와 교육설교가 가장 바람직한 대안이라는 사실도 인정한다. 개인적으로는 그것이 한국교회 개혁의 밑거름이 되기를 바란다. 그러나 바로 이 대목부터 평자는 김 목사와 입장을 달리한다. 왜냐하면 그의 설교가 교육 지상주의에 빠져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예컨대 사랑이라는 주제는 김 목사 설교의 대표적인 표제어인데,(8월21일) 김 목사는 사랑도 역시 배워야 한다고 강조한다. 성령의 열매라는 시리즈 설교 “사랑은 오래 참고”에서 그는 이렇게 언급했다.

그런데 이 사랑은 배워야 합니다. 어느 날 갑자기 사랑이 생겨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사랑으로 제가 사랑하기를 배워 보겠습니다.” 글을 쓰는 사람이 자꾸만 글을 쓰면서 글 쓰는 법을 배우듯이 우리도 사랑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예배드리는 것, 그것은 사랑하는 법을 배우기 위해서 예배드리는 것입니다. 다시 세상으로 나가는 것,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갖고 내가 만나는 사람들에게 사랑을 베풀어 주는 것입니다.(3월6일)

일반적으로 그의 말은 옳다. 우리는 그걸 경험적으로 알고 있다. 어릴 때부터 장애시설을 방문하거나 양로원 같은 곳을 자주 방문하는 훈련을 받은 사람은 그게 몸에 베이기 때문에 계속해서 이런 삶을 살 수 있지만, 그런 환경에서 고립되었던 사람은 이런 일이 매우 어색하다. 교육심리학자들에 따르면 어릴 때 어머니의 사랑을 충분하게 받은 사람은 뒷날 정서적으로 사랑의 마음을 풍부하게 담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렇게 살아간다고 한다. 부부 사이에 “사랑받는 법도 배우는 것”(5월22일)이라는 그의 발언도 일리가 있다. 평자에게는 상당히 부족한 부분인데, 일상에서 사랑한다는 말도 하고, 부드럽게 터치하는 훈련들이 필요한 것만은 분명하다. 평자가 젊은 시절에 읽은 <사랑의 기술>의 저자 에릭 프롬도 역시 사랑에는 피아노 공부와 같은 반복적인 연습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평자는 많은 부분에서 프롬이 이 책에서 주장하는 내용을 받아들이지만, 특히 젊었을 때에는 거의 전적으로 받아들였지만, 사랑과 연습의 관계에 대해서는 동의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두 가지이다.
첫째, 어떤 사람에게 친절한 말을 하고, 불우한 이웃을 돕는 행위가, 즉 김 목사가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는 좋은 인간관계 형성이 곧 사랑 자체는 아니다. 그것은 사랑 없이도 가능한 교양이다. 바울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 예언의 능력, 지식, 산을 옮길만한 믿음, 모든 구제, 자기 몸을 불사르는 희생을 치른다고 하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무의미하다고 말했다.(고전 13:1-3) 무슨 말인가? 사랑은 우리의 능력과 학습과 교양에 의해서 향상될 수 있는 어떤 은사가 아니라 하나님의 존재론이다. 생각해보라. 누가 하나님을 소유할 수 있는가? 하나님은 스스로 자기를 계시하시고 통치하실 뿐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소유할 수 없다면 결국 사랑도 소유할 수 없다는 말이 된다. 사랑이 소유의 차원이 아니라면 분명히 학습의 차원도 아니다.
둘째, 예수가 선포한 임박한 하나님 나라는 훈련을 통해서 올라서는 모범적인 신앙인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인간을 향한 것이다. 예수는 세리와 죄인을 향해서 의인의 모습으로 변화해야 한다는 요구를 하지 않으시고, 그들을 그대로 받아들이셨다. 그들과 함께 먹고 포도주를 마셨다. 예수는 그 어떤 인간도 임박한 하나님의 통치에 마음을 열기만 하면 구원에서 제외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종말론적 지평에서 전하셨다. 이런 점에서 평자의 생각에 사랑은 훈련을 통해서 우리가 획득할 수 있는 어떤 삶의 경지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에 의해서만 가능한 생명의 능력이며 사건이다.
오해가 없기를 바란다. 그리스도교 신앙과 사랑이 아무런 상관이 없다거나, 사랑을 설교하지 말아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다만 사랑은 교육을 통해서 도달할 수 있는 세계가 아니라는 뜻이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사랑하라.”(요 13:34)는 예수의 말씀이나 그 이외에 성서 여러 곳에 진술되어 있는 사랑하라는 말씀은 사랑의 능력에 사로잡히라는 뜻이지, 우리가 사랑을 배울 수 있다거나 성취할 수 있다는 뜻이 아니다. 사랑의 능력에 사로잡히는 것과 사랑을 배운다는 것은 비슷해보여도 근본적으로 다르다. 사랑을 연습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교양의 차원이지만 사랑의 능력에 사로잡히는 건 존재론의 차원, 즉 성령론의 차원이다. 이런 점에서 칭의론은 그리스도교 신앙과 윤리에서 상수(常數)다.
아무리 그렇다 하더라도 설교는 사랑이 메말라가는 이 세상에서 신자들로 하여금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이 되도록 하는 데 무게를 두어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반론이 가능하다. 평자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충분한 해석학적 작업을 거치지 않는 한 사랑하라는 말은 오히려 사랑의 존재론적 능력을 감출 뿐이다. 무슨 뜻인가? 우리는 지금 하나님의 궁극적인 실체를 모르는 것처럼 무엇이 사랑인지 실증적으로, 명시적으로 언급할 만큼 성숙한 사람들이 아니다. 예컨대 어떤 선생들은 학생들에게 체벌하는 걸 사랑이라고 말하고, 어떤 사람은 그렇지 않은 걸 사랑이라고 생각한다. 남편과 아내가 반드시 손잡고 데이트를 즐겨야만 사랑하는 것도 아니다. 그런 건 학습을 통해서 얻어질 수 있는 삶의 기술이다. 평자가 보기에 사랑은 우리가 습득할 수 있는 ‘기술’이 아니라 우리의 예상을 뛰어넘는 ‘신비’이다. 사랑은 하나님의 존재 신비이다. 우리는 바로 그 사실을 설교해야 한다. 그렇다. 복음적인 설교는 사람들을 성숙한 교양인으로 변화시키는 ‘학습’이 아니라 하나님의 존재 신비로 안내하는 ‘초청’이다. 길거리의 노숙자들마저 들어갈 수 있도록 허락되어 있는 천국잔치의 초청장이다. 이런 점에서 설교자들은 사람의 변화보다는 하나님의 신비에 더욱 몰두해야 한다. 우리가 조금 씩 영성이 깊어지면 하나님의 신비가 우리의 전체 영혼을 사로잡을 것이며, 하나님이 창조한 이 세계의 신비도 시나브로 확대되고 또렷해지기 시작할 것이다.

하나님의 신비
평자는 김 목사의 설교에서 하나님의 존재 신비와 신앙의 신비, 그리고 더 나아가 역사의 신비가 심화되는 가르침보다는 청중들을 개혁적인 신앙인으로 견인해내려는 가르침이 상대적으로, 아니 절대적으로 많다는 사실이 아쉬웠다. 그가 제시하는 개혁적인 신앙은 주옥처럼 귀한 것들이며, 한국교회의 개혁을 위한 시금석들이지만 그리스도교 신앙의 근본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이런 문제는 보수와 진보를 막론하고 한국교회 설교자들에게 거의 구조적으로 작용하고 있기 때문에 아무래도 김 목사의 설교를 통해서 조금 더 구체적으로 살펴야겠다.
김 목사는 “성령의 열매” 시리즈 설교를 11주에 걸쳐서 했다. 바울이 갈라디아 교우들에게 보낸 편지에 등장하는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가 그것이다.(갈 5:22,23) 다른 항목들은 한 주로 끝나고 사랑은 세 주로 나누어 설교했다. 본문은 해당 항목에 따라서 골고루 분산되었다. 예컨대 세 번에 걸친 ‘사랑’에 대한 설교는 고린도전서 13:4-7절이 본문이며, ‘희락’은 하박국 3:17-19이 본문이다. 형식적으로 색다른 설교였다. 평자는 이 아홉 가지 성령의 열매라는 목록을, 즉 사랑, 희락, 화평, 오랜 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를 각각 설교의 주제로 삼은 것에 대해서 조금 의아하게 생각한다. H.D. 베츠에 의하면 사랑을 제외한 나머지 개념들은 그리스 철학에서 일반적인 것이다.(국제성서주석 37권, 566쪽) 평자의 질문은 이것이다. 기본적으로 구원론적인 사건에 천착해야 할 주일공동예배에서 일반적인 삶의 교양과 가치에 관한 목록을 설교할 필요가 있을까? 신약학자도 아닌 평자가 단적으로 말할 입장은 아니지만, 성령의 열매에 관한 그 목록은 율법과 할례로부터의 자유를 말하는 바울의 신학이 오용될 수 있는 그 위험성을 차단하기 위한 보충적인 설명이다.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그 당시에 누구나 덕스러운 것으로 인정했던 윤리적인 삶의 목록들을 근본적으로 부정하는 게 아니라고 말이다.
성령의 열매 목록은 바울이 명시적으로 기록한 내용이니까 그것을 설교의 주제로 삼을 수 있다고 주장할 분들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산상수훈을 비롯하여 신약의 많은 부분이, 그리고 구약의 많은 부분이 성령의 열매 목록과 연결해서 해석될 수 있다. 그러나 인간 행동에 대한 가치론적인 해석이라 할 윤리문제는 성서의 중심이 결코 아니다. 성서는 하나님에게 집중하고 있다. 윤리적인 삶이 거론되는 경우라고 하더라도 그것은 결국 하나님과의 일치로부터 발현되는 신앙의 능력일 뿐이지 인간이 무조건 추종해야 할 삶의 어떤 수준이나 기준은 아니다. 우리는 양심적인 사람이 되거나 건전한 시민이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존재 신비와의 일치를 경험하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게 아닐는지. 이런 점에서, 하나님의 신비를 설교해야 한다는 브레넌 매닝의 아래와 같은 진술은 전적으로 옳다.

그럼에도 나는 예수님 얼굴에 빛나는 하나님의 영광(고후 3:18)에 관한 강론이나 설교를 평생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다. 현대설교자들이 이 주제의 설교에 인색한 것은 어쩌면 우리가 하나님의 가봇을 한 번도 스친 적이 없다는 사실 때문일 것이다. 아니면 단순히 우리가 그 개념을 설명할 엄두가 안날 수도 있다. 그것을 언급하면 우리 자신과 회중들을 절대적 신비 속으로 몰아넣는 기분이 든다. 신비는 현대인들의 지성을 당혹케 한다. <중략> 그러나 신비를 피하는 것은 곧 경배와 영광과 찬송 받기에 합당하신 유일하신 하나님을 피하는 것이다. <중략> 그들은 일요일 아침 우리의 잡담거리나 되는 점잖고 사무적인 로터리클럽 풍의 하나님을 거부하고, 경외와 말없는 공경과 전폭적 헌신과 전심의 신뢰를 받기에 합당하신 하나님을 찾는 사람들이다.(신뢰, 복있는 사람, 82, 83쪽)  

물론, 그리고 당연히 김 목사도 그리스도교 신앙이 신비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다.(3월27일, 9월25일) 하나님의 존재 신비인 그 은폐성에 대해서도 정확하게 언급하고 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이 세계 속에 숨어계십니다. 태양 뒤에 숨어 계시고 그름 뒤에 숨어 계시고 때로는 우리의 자연 산천초목 뒤에 숨어 계시고, 우리의 하루의 삶의 시간 뒤에 숨어 계십니다. 그것을 볼 줄 아는 눈이 필요합니다.(10월9일)

그런데 왜 김 목사의 설교는 그리스도인의 모범적이고 개혁적인 신앙과 삶을 학습시키는 데에 쏠려 있을까? 경솔하다는 말을 들을 각오로 한 마디 한다면, 그는 불가지론에 기울어졌는지 모르겠다. 비트겐스타인의 주장처럼 우리가 궁극적으로 모르는 것에 대해서는 말하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이 그에게 너무 강한 것 같다. 그렇지 않다면 아홉 가지 열매만을 직접적으로 설명할 뿐이지 그것의 근원인 하나님 자체에 대해서, 그의 신비에 대해서 해명하지 않는 이유가 설명이 되지 않는다. 그의 다른 설교에서도 그런 경향이 아주 강하게 나타나기에 하는 말이다.
설교자는 하나님의 신비에 대해서 사이비 교주처럼 근거 없이 주술적으로 선포하는 사람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불가지론자도 아니다. 은폐의 신비 앞에서 우리가 당혹스럽지만 우리는 그 신비를, 그 초월성을, 동시에 그것의 내재성을 언어로 진술해야 한다. 이게 바로 그리스도교 신학의 역사였다. 예컨대 삼위일체는 바로 하나님의 존재 신비에 대한 용어(terminology)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삼위일체라는 용어 안에 가둘 수는 없지만 초기 교부들과 신학자들은 그런 용어와 개념을 통해서 하나님의 신비 안으로 들어가려고 용맹정진 했다. 그런 작업은 하나님의 존재 신비가 아직 완료된 질문이 아니기 때문에 오늘 신학자들과 설교자들에게도 여전히 요청된다. 하나님과 그의 창조, 그의 구원과 그의 미래는, 그리고 부활은 여전히 우리에게 화두(話頭)이다. 설교 현장은 설교자와 청중들이 루돌프 오토의 ‘누미노제’ 경험처럼 이런 아득한 하나님의 신비를 맛봄으로써,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에게 임한 하나님의 영광을 맛봄으로써 생명의 영을 충만하게 경험하는 자리이다. 바로 여기서 우리의 영성은 자유로워진다.  
위의 진술은 김 목사의 설교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 제기가 아니라 서로의 관점이 어떤 부분에서 약간씩 다르다는 사실을 의미할 뿐이다. 김 목사와 소망교회가 앞으로 때가 이르면 한국교회의 개혁에 견인차가 될 것으로 기대한다. 그 가능성을 발견한 것만으로도 이번 설교비평 글쓰기에 기울인 평자의 노력은 충분한 보상을 받은 것이리라. <기독교사상, 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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